트럼프주의의 시대, 연대와 협력의 전략적 가치

정체성은 이중적이다. 정체성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누구인지 모른 채, 어디로 가야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무목적의 상태로 살게 된다. 반대로 정체성이 과도하다면, 우리는 나와 내가 아닌 것(타자)을 구별하고, 타자를 배척하며 맹목적으로 살게 된다.

정체성이 ‘건강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타인의 정체성을 왜곡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존중하며 동시에 나의 정체성을 실현시킨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런 건강한 정체감이 상식과 보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태의 어디쯤일 것이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이 지구적인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반이민 정책을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트럼프의 중심 지지층이었던 백인남성의 국가정체성 찾기인 셈이다. 백인남성에게 감정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우리’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아닌 타자들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정치사회적인 제스처인 것이다.

이는 대단히 허구적인 개념이다. 미국은 이민자들로 이뤄진 국가고, 현재의 미국을 완성한 기초는 아메리칸 드림의 비즈니스 에너지,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유입된 ‘난민’엘리트들을 통한 지적 자산 축적, 평등과 다양성을 실현시키며 기회의 땅을 자처했던 지난 역사다. 애초에 백인남성들의 정체성이 미국의 정체성이라는 이야기는 서부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날조된 신화다.

허구적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체성 찾기는 지극히 위험한 전체주의의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의 건강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아닌 것과 나를 구별하며 찾아가는 정체성의 말로는 결국 타자의 희생양 만들기로 끝나곤 한다. ‘나’로 표상되는 정체성 집단 내에서 벌어지는 무기력과 분노를 집단 외부의 타자에게 투사하고, 이들을 적대시하며, 억압하고 공격해 집단 내부의 정체성을 공고화하는 행위는 역사를 통해 수차례 실현했다. 현재의 세계 혼란의 한 축인 이른바 이슬람근본주의도 일맥상통한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이런 허구적이며 위험한 징후들이 왜, 지금, 미국에서 등장했느냐는 것에 있다. 전 세계적인 경제의 후퇴와 일자리 부족, 양극화의 심화는 사회적인 갈등들을 낳는다. 이 갈등들과 포퓰리즘 정치의 결합이 트럼프주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세계적인 경제의 후퇴와 일자리 부족, 양극화 심화가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과 혁신이 일어나고, 고부가가치 산업이 실현되고 있다고 하지만, 고용창출을 하는 전통산업에서의 혁신은 오히려 양질의 일자리 부족 현상과 깊게 결합되곤 한다. 여기에 지대수익, 금융수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빈부 양극화는 딱히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정체성이 위험을 만들어낼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몇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다급하게 ‘우리’라는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우리도 ‘우리’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커뮤니티 내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모두 ‘우리’안에 가두고, 독식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대개 빅픽처를 그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한계가 분명하다. ‘우리’라는 성을 쌓는 동안 외부에서 고립되고, 이 ‘우리’안에서 또 다른 분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대안은 우선 ‘우리’를 극복하려는 상태로 생각과 체제를 빠르게 전환하는 것이다. 이른바 연대와 협력의 전략이다. 더 나아간다면 플랫폼 전략이다. 우리 스스로를 플랫폼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독식의 구조체가 아닌 나눔과 상호호혜성 의지들과 행동들이 교차하고 엮일 수 있는 다발(bundle)체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누구든 우리 안에 들어와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이 협력을 통해 파이를 키우는 전략이다.

물론 현재의 트럼프주의는, 두 번째 대안, 즉 연대와 협력의 전략에 대해 미국이 가진 불만의 표현이기도 하다. 미국은 세상에 기여해왔는데, 타자들이 미국에서 돈을 벌어갈 뿐, 미국을 위해 기여한 것이 없다는 것이 그 불만의 핵심이니 말이다. 그러나 트럼프주의가 이런 미국적 불만에 대한 대안으로 작동할지는 앞서 말한 것처럼 미지수다.

우리에게 이는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트럼프주의는 지속가능한 성장에 대한 조금 더 근본적이며 분명한, 그리고 전략적인 판단을 요구한다.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생각과 방식이 등장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사회문제를 비즈니스의 기회로 예민하게 포착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비즈니스의 기회를 창출하는 기업가 정신과 같은 사고가 필요하다. 이전의 문제해결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하고, 섹터간 혹은 영역간 적극적인 협력과 협업을 통해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전통적인 역할 구분법과 역할분담에 대해서는 과감하고 도전적인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만이 아닌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공동 과제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와 같은 주제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다.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은 기업과 사회의 공동번영을 위한 고민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쉽게 짐작되고 정의되는 ‘우리’는 진짜 우리가 아니다. 폐쇄적이며 자기만족적이며 소수가 독식하는 ‘우리’도 진짜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타자에 의해 그 정체성이 규정되지 않는, 무수히 많은 다양성과 가능성이어야 한다. 그 안에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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